《그날 밤, 우리가 나눈 것들》
이건우는 새벽 2시에 가장 또렷해졌다. 모두가 잠든 도시의 틈 사이에서 그는 매일 블로그에 소설을 올렸다. 자판 소리는 마치 심장박동처럼 일정했고, 방 안의 공기는 정적을 머금고 무거웠다.
창밖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가운데, 작은 스탠드 조명 아래 그의 모니터에는 제목이 없는 초안이 떠 있었다. 글자는 조용히 쌓여갔지만, 건우의 손은 몇 문장을 쓰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마음속에서 어떤 장면이 끊임없이 되살아났다. 오래전의 여름밤, 오래전의 바다, 오래전의 마음. 그리고 그 안에, 김인유가 있었다.
김인유는 건우가 열다섯이던 해, 학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늘 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있었고, 눈을 맞출 때마다 짧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말수는 적었지만 감정 표현이 풍부한 아이였고, 손에는 항상 작은 시집이나 공책이 들려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둘은 종종 마주쳤고, 말 대신 종이와 글을 주고받으며 친해졌다. 인유는 건우의 단편 소설 초안을 천천히 읽고 진심 어린 감상을 적어주었고, 건우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다. 무엇보다 그녀는 건우의 글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는 유일한 독자였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두 사람은 같은 학교를 다녔지만, 서로 다른 반, 다른 관심사, 다른 시간표 속에서 점점 멀어졌다. 인유는 방송부 활동으로 바빴고, 건우는 문학부에서 홀로 원고를 다듬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엔 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을 매울 기회는 점점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인유가 먼저 건우를 불렀다. 짧고 조용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전하려 했지만, 건우는 그 말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고, 둘은 그날 이후로 조금 더 멀어졌다. 감정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문장 사이에만 남게 되었다.
몇 달이 지나 여름 방학 무렵, 인유에게서 연락이 왔다. 갑작스럽게 바다를 보러 가자는 말이었고, 건우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무작정 기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불빛들, 어둠 속의 터널, 그리고 긴 침묵. 말은 없었지만 둘 사이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무언가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해운대의 끝자락에서 그들은 바다를 마주하고 앉았다. 바람은 차가웠고, 파도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인유는 바다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털어놓았다. 지금의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말,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는 고백. 그리고 곧 제주도로 전학을 간다는 이야기.
건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귓가에서 또렷하게 맴돌았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입을 열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수십 개의 문장이 떠올랐지만, 그 어떤 문장도 완전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문장을 꺼냈다. 목소리는 낮고 느렸으며, 그의 모든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인유는 고개를 돌려 건우를 바라봤고, 미묘한 표정으로 아주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어떤 말보다 분명한 이해가 오갔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 침묵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배경음처럼 흐르고, 서로의 존재만이 또렷하게 남았다. 밤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긴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건우는 그녀가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글보다 더 선명한 현실이었고, 건우는 그 기억을 아주 조심스럽게 가슴 깊이 접어두었다.
가을이 오고, 인유는 정말로 떠났다. SNS에서는 그녀의 계정이 조용히 비워졌고, 마지막 연락 이후 더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
건우는 여전히 소설을 썼다. 블로그에 올리는 단편들은 하나같이 조용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띠었고, 그 글들 사이사이에 인유의 흔적이 스며 있었다.
그리고 오늘, 건우는 또다시 새벽 2시에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고, 그는 한 문장을 썼다.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이해했다. 말없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한 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열린 결말이지만, 건우에게는 하나의 완결이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게 했다.
작가의 말
"결말이 없는 이야기들은 이상하게도 더 오래 남는다. 김인유, 그 이름은 내가 쓰는 모든 이야기의 여백 속에 있다. 지금 어디에 있든,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지금까지 허구의 허구한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